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문도 점령 사건 (문단 편집) == 후일담 ==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점차 일본을 압도해갔으나,[* 경제 면에서는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먼저 진출한 일본이 우위에 있었으나 청나라가 임오군란을 계기로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바탕으로 쫓아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진다. 한편 영국은 거문도가 별로 쓸모없다고 판단해 물러나기는 했지만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 여전히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한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며, 이는 러시아에 부담이 되었다. 한편 러시아는 거문도 점령으로 말미암아 태평양 함대가 대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목이 차단되어 극동에서 러시아 해군의 움직임이 제한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육군을 극동에 보내 세력을 확장하기로 마음 먹었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완공을 위해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 제국|일본]]이 확보한 [[랴오둥 반도]]를 토해내도록 한 뒤, [[1896년]] [[만주]]에서 동청 철도 부설권을 따냈다. 1897년 [[을미사변]]이 일어났으나 [[아관파천]]으로 러시아는 고종의 영향력을 활용, [[영도구|절영도]] 조차 시도도 있었다. [[러시아 제국]]은 또한 [[1900년]]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 뒤 [[만주]]에서 철수하지 않고 점령을 지속하여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고 더 나아가 [[대한제국]]의 용암포를 점령, 조차, 개항함으로써 한국 역시 영향권 하의 [[완충국]]이나 보호국으로 만들 의향을 보였다([[1903년]]의 용암포 사건).[* 이는 [[고종황제]] 역시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 영, 일의 반대로 조차를 개항으로 변경했다.] 러시아의 이런 움직임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와 팽창을 경계하던 영국과, 신흥국으로 부상한 일본에게 커다란 부담거리가 되었고, 두 국가는 서로 간 이해관계가 들어맞아 [[1902년]] 동맹을 맺기에 이른다([[영일동맹]]). 그리고 2년 뒤인 [[1904년]]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의 극동에서의 남하는 완전히 좌절되었으며, 러시아는 현실을 인정하여 영국, 미국과 협상을 맺고 '[[그레이트 게임]]'을 끝내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